마르쿠스 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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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쿠스 볼프는 독일 출신의 첩보원으로,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의 해외정보국(HVA) 국장을 역임했다.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 공산주의 활동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련으로 망명하여 첩보 훈련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독으로 돌아와 슈타지에서 활동하며, '얼굴 없는 사나이'로 불릴 만큼 은밀하게 서독 정부, 정치계, 재계에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1986년 은퇴 후에는 작가로 활동했으며, 1989년 알렉산더 광장 시위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독일 통일 후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1997년 불법 감금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6년 사망했으며, 존 르 카레의 소설에 등장하는 카를라의 모델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르 카레는 이를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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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볼프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르쿠스 요하네스 볼프 |
별명 | 미샤 |
출생일 | 1923년 1월 19일 |
출생지 | 바이마르 공화국 호엔촐레른 주 헤힝겐 |
사망일 | 2006년 11월 9일 |
사망지 | 독일 베를린 |
매장지 | 프리드리히스펠데 중앙 묘지 |
국적 | 동독 → 독일 |
아버지 | 프리드리히 볼프 |
어머니 | 엘제 볼프 |
형제 | 콘라트 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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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소속 | 동독 국가보안부 대외정찰총국 |
복무 기간 | 1951년–1986년 |
최종 계급 | 상급대장 |
소속 기관 | 정찰 총국 () |
학력 | 모스크바 항공 대학교 |
훈장 | |
훈장 | [[파일:Held der Arbeit.png|23px]] [[파일:100 lenin rib.png|23px|border]] [[파일:20 years of victory rib.png|23px|border]] [[파일:30 years of victory rib.png|23px|border]] [[파일:40 years of victory rib.png|23px|border]] [[파일:CombatCooperationRibbon.png|23px|border]] |
2. 생애
마르쿠스 볼프는 1923년 1월 19일 헤칭겐(Hechingen)에서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볼프와 비유대인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3][4] 형제로는 영화 감독인 콘라트 볼프(Konrad Wolf)가 있었다.
1933년 나치당(Nazi Party) 집권 후, 볼프는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Switzerland), 프랑스(French Third Republic)를 거쳐 모스크바(Moscow)로 이주했다.[5][6][7] 망명 생활 중 독일 칼 리프크네히트 학교(Karl Liebknecht School)와 러시아 학교를 다녔으며, 1936년 소련 신분증을 취득했다.[8]
2. 1. 유년 시절과 망명
마르쿠스 볼프는 1923년 1월 19일 헤칭겐(Hechingen), 호엔촐레른 주(Province of Hohenzollern)(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주(Baden-Württemberg))에서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와 비유대인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3] 그의 아버지는 작가, 공산주의 활동가, 의사였던 프리드리히 볼프(Friedrich Wolf, 1888–1953)였고,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 엘제 볼프(엘제 드라이볼츠(née Dreibholz), 1898–1973)였다.[4] 그는 영화 감독인 콘라트 볼프(Konrad Wolf, 1925–1982)라는 형제가 있었다.1933년 반공산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나치당(Nazi Party)이 권력을 잡은 후, 볼프는 아버지의 공산주의 신념과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Switzerland)와 프랑스(French Third Republic)를 거쳐 모스크바(Moscow)로 이주했다.[5][6][7]
망명 생활 동안 볼프는 প্রথমে 독일 칼 리프크네히트 학교(Karl Liebknecht School)에 다녔고, 나중에는 러시아 학교에 다녔다. 1936년, 13세의 나이에 소련 신분증을 취득했다.[8] 그는 독일, 소련, 그리고 나중에는 동독 시민이었다.[9]
2. 2. 첩보원 훈련과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볼프는 모스크바 항공 공학 연구소(현재 모스크바 항공 연구소)에 입학했으나, 나치 독일의 소련 공격으로 알마아타로 대피했다. 1942년 코민테른 특무학교에서 파괴 공작 등 첩보원 훈련을 받았다.[41] 코민테른 해체 후에는 대독일 공작 라디오 방송국인 도이처 폴크센더(Deutscher Volkssender)의 편집장 겸 해설자를 지냈다.[42]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독일 인민 라디오에서 뉴스 진행자로 일했다.[10]전쟁 후,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울브리히트 그룹과 함께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소련 점령 지역 라디오 방송국 기자로 일했다. "미하엘 슈트롬(Michael Strom)"이라는 가명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취재했으며,[43] 주요 나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 전체를 취재한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소련 주재 동독 대사관에서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고,[44] 같은 해 국가보안부(Ministry for State Security)(Stasi)에 합류했다.[10]
3.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 활동
1940년 모스크바 항공 연구소에 입학했으나, 나치 독일의 소련 공격으로 알마아타로 대피했다. 1942년 코민테른에서 적진 잠입 작전 훈련을 받았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인민 라디오에서 뉴스 진행자로 일했다.[10]
전쟁 후 발터 울브리히트 그룹과 함께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소련 점령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했다. 뉘른베르크 재판 전체를 취재하기도 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소련 주재 동독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이후 국가보안부(Stasi)에 합류했다.[10]
3. 1. 슈타지 창설과 해외정보국(HVA)
1951년 9월, 마르쿠스 볼프는 "경제학연구소(IPW)"라는 위장 명칭을 가진 슈타지의 대외 정치 정보 부서 APN(HVA의 전신)에 편입되었다.[45] 1952년 12월, 29세의 나이로 국가보안부(MfS) 산하 해외정보국(HVA) 창설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동 부서의 장관에 임명되었다.[10][46] 1958년에는 슈타지 대외 정보를 담당하는 “A”총국(Hauptverwaltung Aufklärung, 약칭 HVA[47])이 창설되면서 “A”총국장 겸 국가보안성 차관에 취임했다. 볼프는 정보국장으로서 스파이를 통해 서독 정부, 정치계, 재계에 성공적으로 침투했다.[9] 특히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비서이자 측근이었던 귄터 빌헬름이 동독 첩자임이 밝혀지면서 1974년 브란트의 사퇴로 이어졌다.[11]볼프의 지휘 아래 슈타지는 세계적인 첩보 기관으로 발전했다. HVA에서 대부분의 경력 동안 볼프는 은밀함 때문에 "얼굴 없는 사나이"로 알려졌다. 서방 첩보 기관은 1979년 동독에서 망명한 이중 스파이에 의해 BND가 그의 얼굴 사진을 확인하여 『슈피겔』지 1979년 3월 5일 호 표지에 실릴 때까지, 오랫동안 슈타지의 대외 정보 부서를 누가 지휘하는지 알 수 없었다.[48] 1978년 스웨덴 스톡홀름 방문 중 스웨덴 국가정보기관인 Säposv에 의해 사진이 찍혔고, 탈북자 베르너 스틸러가 그 사진 속 인물을 서독 방첩부에 볼프로 확인했다.[12][13][14] CIA 내부 요소들이 뉘른베르크 재판 참석자 사진을 통해 1959년까지 그를 확인했다는 주장도 있다.[15]
이에 대해 볼프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허세이자 변명처럼 들리는 발언을 했다.[49] 그는 첩보 활동에서 휴민트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50] 1982년에는 볼프가 동생 콘라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습이 서독 잡지 「슈테른」의 사진 기자에게 촬영되었으나, 그 네거티브는 「슈테른」 편집부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얼굴이 알려진 후에는 서방 국가 입국이 어려워졌다. 1986년 5월 30일, 대장으로 진급한 후 슈타지에서 사직했으며, 칼 마르크스 훈장을 수훈받았다.[51]
3. 2. '얼굴 없는 남자'
1952년 12월, 29세의 마르쿠스 볼프는 국가보안부(MfS) 산하 해외정보국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다.[10] 정보국장으로서 그는 스파이를 통해 서독 정부, 정치계, 재계에 성공적으로 침투했다.[9] 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비서이자 측근이었던 귄터 빌헬름인데, 그가 동독 첩자임이 밝혀지면서 1974년 브란트의 사퇴로 이어졌다.[11]해외정보국에서의 대부분의 경력 동안 볼프는 은밀함 때문에 "얼굴 없는 사나이"로 알려졌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1978년 스웨덴 스톡홀름 방문 중 스웨덴 국가정보기관인 Säposv에 의해 사진이 찍힐 때까지 동독 정보국장의 실제 모습을 몰랐다고 한다. 탈북자 베르너 스틸러가 그 사진 속 인물을 서독 방첩부에 볼프로 신원을 확인했다.[12][13][14] 1951년 9월, “경제학연구소(IPW)”라는 위장 명칭을 가진 슈타지의 대외 정치 정보 부서 APN(HVA의 전신)에 편입되었다.[45] 1952년 12월, 29세의 나이로 동 부서의 장관에 임명되었다.[46] 1958년, 슈타지에 대외 정보를 담당하는 “A”총국(Hauptverwaltung Aufklärung, 약칭 HVA[47])이 창설되면서 “A”총국장 겸 국가보안성 차관에 취임했다. 오랫동안 서방 첩보 기관은 슈타지의 대외 정보 부서를 누가 지휘하는지 알 수 없었고, 1979년 동독에서 망명한 이중 스파이에 의해 BND가 그의 얼굴 사진을 확인하여 『슈피겔』지 1979년 3월 5일 호 표지에 실리기 전까지 볼프는 “얼굴 없는 남자”로 불렸다.[48]
3. 3. 첩보 전략과 성과
볼프는 1951년 9월 "경제학연구소(IPW)"라는 위장 명칭을 가진 슈타지의 대외 정치 정보 부서 APN(HVA의 전신)에 들어갔다.[45] 1952년 12월, 29세의 나이로 이 부서의 장관이 되었다.[46] 1958년 슈타지에 대외 정보를 담당하는 "A"총국(Hauptverwaltung Aufklärung, 약칭 HVA[47])이 창설되면서 "A"총국장 겸 국가보안성 차관에 취임했다. 볼프의 지휘 아래 슈타지는 세계적인 첩보 기관으로 발전했다. 오랫동안 서방 첩보 기관은 슈타지의 대외 정보 부서를 누가 지휘하는지 알 수 없었고, 1979년 동독에서 망명한 이중 스파이에 의해 BND가 그의 얼굴 사진을 확인하여 『슈피겔』지 1979년 3월 5일 호 표지에 실리기 전까지 볼프는 "얼굴 없는 남자"로 불렸다.[48]이에 대해 볼프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허세이자 변명처럼 들리는 발언을 했다.[49] 첩보 활동에서는 휴민트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50] 1982년 볼프가 동생 콘라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습이 서독 잡지 「슈테른」의 사진 기자에게 촬영되었으나, 그 필름은 「슈테른」 편집부에서 사라졌다. 얼굴이 알려진 후에는 서방 국가 입국이 어려워졌다. 1986년 5월 30일 대장으로 진급한 후 슈타지에서 사직했다. 칼 마르크스 훈장을 받았다.[51] 은퇴 후에는 저술에 전념하여 첫 저서 『트로이카』를 발표했다.[52] 귄터 기욤과 그의 아내 크리스텔 기욤 부부 등 브란트 내각에 있던 슈타지 스파이들을 서독에 침투시킨 것도 그였다.
3. 4. 테러 지원 의혹
1986년까지 마르쿠스 볼프는 동독이 비사회주의 경제 지역(NSW, Nicht-Sozialistische Wirtschaftsgebiet|니히트조치알리스티셰 비르츠샤프츠게비트de)으로 간주한 지역, 즉 코메콘 회원국이 아닌 국가들, 특히 아랍 세계에서 테러를 지원한 혐의를 받는 3국을 담당했다. 모든 테러 관련 정보는 그에게 직접 보고되었다.[9] 동독의 훈련소에서 슈타지(Stasi)의 훈련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은 니카라과, 앙골라, 모잠비크,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에티오피아, 남예멘, 팔레스타인 등 동독 지지 국가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동독 대사관에 대량의 무기와 폭발물을 비축해 두었다.[9]동독은 이들 주요 국가에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소련의 KGB는 볼프의 슈타지가 KGB와 노력을 조율할 것을 요구했다. 1970년대부터 양측은 동등한 입장에서 협력하여 모스크바 센터에 저장된 모든 동유럽 정보기관의 데이터를 사용, 동독과 소련 우호적인 모든 보안 기관의 국제 테러 정보를 통합했다.[9] 볼프의 슈타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보안 여단을 방첩 훈련시키고, PLO 훈련생들에게 미국 정보기관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으며, 슈타지의 서방 정보기관 감시를 통해 동독과 동맹을 맺은 국가 출신 테러리스트들의 체포를 막았다.[9]
적군파가 서독에서 테러를 자행하는 동안, 볼프의 슈타지는 동독 내에 적군파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9] 볼프의 슈타지는 니카라과, 앙골라, 모잠비크, 남예멘, 에티오피아 정보기관에 직접 훈련을 제공했다.[9] 또한 동독 체류 중인 소련 친화적인 아프가니스탄의 나지불라를 지원했지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한 서독의 모든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조직은 잠입되었고, 고위 KGB 장교들이 서독의 무자헤딘 센터에 대한 작전을 통제했다. 소련 정보기관, 특히 GRU와 KGB는 아프가니스탄 작전이 볼프의 슈타지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민감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9]
볼프의 슈타지가 직접 지원한 다른 테러 관련 인물, 단체 및 사건으로는 PLO를 이끈 야세르 아라파트, PFLP(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를 이끈 조르주 하바시, 베네수엘라 출신의 "세파라트(Separat)"라는 암호명으로 알려진 "카를로스(Carlos the Jackal)"로 알려진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 1986년 4월 서베를린 라 벨 디스코텍 폭탄 테러에 연루된 테러리스트들, 아부 니달, 그리고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에서 뮌헨 대학살을 기획한 아부 다우드가 있다.[9]
4. 은퇴 이후
볼프는 1986년 상장 계급으로 은퇴했으며, 동독 외국 정보부 수장직은 베르너 그로스만(Werner Grossmann)이 계승했다. 그는 1930년대 모스크바에서의 성장 과정을 쓴 그의 고인이 된 형 콘라트의 작업을 계속했다. "트로이카(Troika)"라는 책은 동독과 서독에서 같은 날 출판되었다.
평화혁명 기간 동안 볼프는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취한 강경한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개혁을 지지했다.[16] 1989년 11월 알렉산더광장(Alexanderplatz) 시위에서 연설했는데, 그의 연설 중에 극도로 분열된 군중들로부터 야유와 박수를 동시에 받았다. 연설을 "중단하라"는 외침과 심지어 볼프를 "교수형에 처하라"는 외침도 들렸다. 반체제 인사인 바르벨 보흘레이(Bärbel Bohley)는 "그의 손이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자 떨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옌스 라이히(Jens Reich)에게 말했다. 이제 갈 수 있어요. 이제 다 끝났어요. 혁명은 돌이킬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17]
4. 1. 작가 활동
슈타지 퇴직 후 문필가로 전향하여 『트로이카』, 『이국에서의 게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친구는 죽지 않는다』 등 총 6권의 저서를 발표했다.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쿨보이 각하』, 『스마일리와 그의 사람들』 등에 등장하는 소련의 스파이 마스터 카르라(Karla)의 모델이 아니냐는 소문이 자주 나돌았으나,[58] 작가 르 카레는 이 소문을 반복해서 부인했다.[59]
잡지 인터뷰에서 서독보다 더 많은 실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로 정보부 요원들을 (서독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것과 신념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던 것 두 가지를 들었다.[60] 스파이 소설에서는 그레이엄 그린의 『하바나의 남자』를 좋아한다고 답했다.[60]
4. 2. 독일 통일 이후
볼프는 1986년 상장(Generaloberst) 계급으로 은퇴했으며, 동독 외국 정보부 수장직은 베르너 그로스만(Werner Grossmann)이 계승했다. 그는 1930년대 모스크바에서의 성장 과정을 쓴 그의 고인이 된 형 콘라트의 작업을 계속했다. "트로이카(Troika)"라는 책은 동독과 서독에서 같은 날 출판되었다.평화혁명 기간 동안 볼프는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취한 강경한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개혁을 지지했다.[16] 1989년 11월, 동유럽 혁명의 영향으로 민중 시위가 빈발하던 중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열린 시위에서 연설자로 나서 동독의 개혁을 지지하는 한편, 국가보안부 협력자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여 청중으로부터 반대하는 야유를 받았다.[53] 정계에 진출하려던 볼프의 계획은 이 순간에 무산되었다. 그는 1989년 11월 알렉산더광장(Alexanderplatz) 시위에서 연설했는데, 그의 연설 중에 극도로 분열된 군중들로부터 야유와 박수를 동시에 받았다. 연설을 "중단하라"는 외침과 심지어 볼프를 "교수형에 처하라"는 외침도 들렸다. 반체제 인사인 바르벨 보흘레이(Bärbel Bohley)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독일 통일 후 볼프는 오스트리아, 그 후 소련으로 이주했다.[54] 1990년 9월, 독일 통일 직전 볼프는 독일을 탈출하여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 소련 8월 쿠데타 이후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오스트리아 당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36] 거절당하자 그는 독일로 돌아왔고 독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볼프는 1991년 9월 24일 바이에른 주의 외딴 지역에 들어가 국경에서 독일 당국에 자수하여 국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55] 볼프는 미국으로 망명하라는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제안, 즉 거액의 돈, 성형수술을 통한 새로운 신원, 캘리포니아의 집을 거절했다고 주장했다.[3]
1993년 그는 Oberlandesgerichtde 뒤셀도르프(Düsseldorf)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8] 그러나 1995년 연방헌법재판소는 동독 내부가 아닌 곳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던 동독인을 국가 반역죄로 기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의 유죄 판결은 1995년에 취소되었다.[36] 이 판결은 서독이 당시 별개의 국가였기 때문에 독일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에 의해 뒤집어졌다.[19] 1996년 저서 출판에 맞춰 미국 입국 비자를 신청했지만, 과거 테러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생전 미국에 입국하지 못했다. 1997년 그는 불법 감금, 강요, 상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20] 같은 해,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가 게르하르트 플레미히(Gerhard Flämig)의 스파이 혐의 재판에서 증언을 거부하여 법정모독죄로 3일간 구금되었다.[21] 볼프는 플레미히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첩보원이 아니라고 말했다.[22]
이후 독일 베를린에 거주했다. 은퇴 후에는 CIA, 모사드, MI6에서 고문으로 초빙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4. 3. 사망
마르쿠스 볼프는 2006년 11월 9일 베를린 자택에서 수면 중 사망했다.[23] 그는 화장되어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묘지(Zentralfriedhof Friedrichsfelde)의 "페르골렌베크(Pergolenweg)" 명예묘역(Ehrengrab)에 있는 그의 형 콘라트 볼프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23],[57]사망 당시 장례식에는 한스 모드로 등 구 동독 정부 관계자와 러시아 정부 대표, 전 HVA 직원 등 약 1500명이 참석하여 그를 영웅으로 추모했다.[57]
2011년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 사회법원은 그의 부인 안드레아 볼프가 남편이 "파시즘 반대 투사"로서 박탈당했던 "보상 연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24]
5. 대중문화
존 르 카레의 소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더 아너러블 스쿨보이'', ''스마일리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러시아 출신 가상 인물 카를라는 일부 독자들에게 마르쿠스 볼프를 모델로 했다고 여겨졌다.[25] 그러나 작가는 이를 여러 차례 부인했으며, 볼프 사망 당시 인터뷰에서도 다시 한번 부인했다.[26] 르 카레는 또한 볼프가 ''냉전에서 온 스파이''의 피들러 캐릭터의 영감이 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말했다. 피들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망명 생활을 한 독일 유대인으로 동독 정보부의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지만, 르 카레는 책을 쓸 당시 마르쿠스 볼프를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볼프를 알베르트 슈페어와 도덕적으로 동등한 인물로 여겼다고 덧붙였다.[27] 그는 책 초고에서 등장인물의 코드네임이 '볼프'였던 것은 우연이며, 자신의 잔디깎이 기계 브랜드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했다.[28] 그는 동독 정보부에 실제로 '볼프'라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꿨다고 밝혔다.[29]
반대로 볼프는 1960년대 초 한동안 ''냉전에서 온 스파이''만 읽었고, 동독 보안기관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했는지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르 카레가 국가보안부 내부 상황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의아해했다.[28]
볼프는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사기꾼''에 등장인물로 나온다. "자부심과 극단적인 편견"이라는 제목의 부분에서 KGB 요원은 동독에서 영국 첩보원을 추적하는 동안 동독 정보부와 연락한다. 포사이스는 그의 초기 소설 ''제4의 의정서''에서도 볼프와 동독 정보부 전체를 가짜 깃발 작전 모집 기법의 대가로 묘사한다.
6. 가족 관계
배우자 | 결혼 기간 | 비고 |
---|---|---|
에미 슈텐처 (Emmy Stenzer) | 1944년 ~ ? | 프란츠 슈텐처의 딸, 프리드리히 볼프의 기록 보관 책임자 |
크리스타 하인리히 (Christa Heinrich) | 1976년 ~ 1986년 | |
안드레아 슈팅글 (Andrea Stingl) | 1986년 ~ |
자녀로는 타냐 트뢰겔(Tanja Trögel), 클라우디아 발(Claudia Wall), Franz Wolf (Manager)|프란츠 볼프de가 있다.[30][31][32]
타냐 트뢰겔은 좌파 활동을 지지하며 가족의 열정을 이어갔다.[30] 그녀는 레니츠에 있는 프리드리히 볼프 기념관 관장이다.[33]
의붓딸 클라우디아 발(1969년 또는 1970년 출생)은 1997년 가을부터 2008년 말까지 발 AG의 설립자인 한스 발과 결혼했다.[30][34] 그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엘리자베스(Elisabeth, 1996년 또는 1997년 출생)라는 딸을, 한스 발과의 두 번째 결혼에서 요하나(Johanna, 1997년 또는 1998년 출생)라는 딸을 두었다.[34][35]
프란츠 볼프(1953년 5월 베를린 출생)는 지브롤터에 거주하며 미하일 프리드만이 소유한 알파 그룹 계열사들의 경영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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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と同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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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Markus W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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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私は平和に貢献した
TBSブリタニカ
199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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